복음주의를 재점검함
우리의 상황 전체를 재점검하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에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여전히 진정한 복음주의자로 자처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누가 복음주의자인지 정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25-26년 전에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를 시작할 당시 이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유럽의 일부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복음주의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복음주의자라는 용어가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훨씬 광범위하고 느슨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종교의 판도를 로마 카톨릭 교회와 복음주의 교회로 양분하고, 로마 카톨릭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복음주의자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너무나 막연한 정의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 가 엄연히 한정된 용어임을 밝히고 나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 강의의 주제는 “기독교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논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논제는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에 참석한 우리는 그런 광범위한 의미만을 지닌 기독교 단체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우리 자신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논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신자들 가운데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 점을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한정된 의미입니다. 몇 가지 점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점들은 배제하고 어떤 점들은 강조하는데, 내가 관심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배제하고 강조하는 작업이 명쾌하게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독교 일반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 기독교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복음적 신앙이 기독교 신앙 교리 자체를 참되게 표현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리적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은 참된 교리를 충분하게 진술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를 믿고 가르치고 전해야 사람들이 회심하고 교회에 가입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잘못된 교리를 취하면 사람을 회심시킬 수 있는 영향력이 끊깁니다. 이 점에서도 교회의 긴 역사에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를 규명하고 그것은 ‘최후의 일각’ 까지 지키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복음주의를 기독교 일반과 구분할 수 있을까요? 나는 앞으로 몇 년 내에 여러분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미 각자 소속된 나라에서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한계를 어디로 정해야 합니까? 이 문제를 논하는 데는 두 가지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 역시 과거의 역사를 토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잘못된 구분에 따르는 위험
첫 번째 위험은, 복음주의를 지나치게 좁고 엄격하고 상세하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이른바 교회 분열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분열이 무엇입니까? 분열을 가장 잘 정의해 놓은 곳은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그중에서도 12장일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도 참고할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대사도가 정의해 놓은 분열이란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에는 일치하지만 본질적이지 않은 요소에는 일치하지 않아 갈라지는 것입니다. 분열은 몸을 찢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분열의 죄는 오직 진리, 곧 본질적인 진리는 믿되 본질적이지 않은 다른 것들은 부정하는 사람만 범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집단과 파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분열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로 갈라져 있었습니까? 사도가 지적하는 몇 가지 이유를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의 교인들은 각자 선호하는 설교자를 내세운 까닭에 갈라졌습니다. 제각각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나는 게바에게 속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들에는 모두 일치했으나 각자 선호하는 설교자를 놓고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논쟁을 벌이면서 제각각 그룹을 형성한 채 어떤 지도자들이 더 훌륭한지 여부로 서로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분열의 또 한가지 원인은 지식과 이해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남들보다 생각이 트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행위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우상이란 실재가 아니라 공상의 산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헛것입니다. 따라서 이교 신전에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라고 해서 고기에 무슨 영향이 발생했을 리 없습니다. 고기를 오염시킬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각이 트인 사람들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고기를 먹으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약한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전통과 성장 배경에 매여 있던 그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기에 고기를 먹는 형제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 진리와 교리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치했으나, 강한 형제들과 약한 형제들, 생각이 트인 상태와 트이지 않은 상태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분열의 두 번째 원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가 드러낸 가장 심각한 분열은 영적 은사에 관한 문제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한분이시고 동일하신 성령께서 고린도 교회의 다양한 교인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의 몸에 주신 것이며,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것을 선용하여 교인들을 진리로 세우고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장성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선용하지 못함으로써, 은사들이 연합과 장성의 원동력이 되지 못하고 분열과 분쟁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문제에서도 이 교회의 교인들은 각자 따로 행동했고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사도는 이와 같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분열’ 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가르칩니다. 다들 신앙의 중심 교리에는 일치하면서도 구원에 본질적이지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문제들로 서로 나눠져 다투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복음주의자들 앞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위험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자칫 지나치게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가 걸어온 긴 역사에는 이러한 유형의 분열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지리멸렬한 현상을 놓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개신교를 향해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데, 그것은 일리 있는 비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거대한 이동을 감행함으로써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교회를 갈라놓았습니다.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그 일을 감행한 순간에 그와 함께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에게서 갈라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루터파와 개혁파로 크게 양분되었고, 그런 다음에는 다양한 재세례파 집단들이 생겼습니다. 로마 교회는 “바로 그것이다. 너희가 우리를 떠난 순간에 발생한 결과가 바로 그것이 아니냐?” 하고 비난했습니다. 그 후에도 유사한 경향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웃지못할 사례도 있습니다. 내 말이 민족적 자부심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열의 경향을 다른 나라들보다 현저하게 드러낸 나라는 스코틀랜드입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분열을 더 많이 겪었습니다. 이 나라의 교회들은 한결같이 장로교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집단과 교단으로 쪼개져 있습니다. 이 나라의 역사, 특히 18세기 역사를 살펴보면 새빛파(New Light)와 옛빛파(Old Lignt), 시만파(Burghers)와 반시민파(Anti-Burghers)로 알려진 다양한 집단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신앙의 중심 교리들에는 일치했으나 지엽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자치도시 정부에 충성서약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따위의 문제로 분열되어 각자 따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계셨는데, 내외가 모두 경건하고 유능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치도시에 충성서역을 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가 교회의 문제로 불거졌을 때 내외는 각자 다른 견해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의견 차이를 확인한 두 사람은 주일아침에 평소대로 목사관을 나와 예배당까지는 나란히 걸어갔습니다. 남편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내는 남편과 떨어져 계속 걸어갔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아내는 혼잣말로 남편을 향해 ‘당신이 여전히 내 남편일 수는 있으나 더 이상 내 목사님은 아닙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서 반시민파 사람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해 있는 위험들 가운데 하나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 앞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완고하고 경직되고 편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분열의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침례교와 이른바 형제회라 불리던 사람들 사이에도 분열이 있었습니다.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는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출범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형제들이었고 저마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집단의 역사와 그동안 집단에서 발생해 온 분열을 잘 살펴보면, 신앙의 중심 문제들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지엽적인 문제들 때문에 빈번히 분열이 발생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침례교와 감리교를 비롯한 여러 다양한 교단들 가운데서도 그와 유사한 분열이 끊임없이 발생해 왔습니다.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동일한 복음적 신앙을 주장해 온 사람들 가운데 어떠한 분열들이 발생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사람들 위주로 분열했습니다. 미묘하고 개별적인 쟁점들을 놓고 분열했습니다. 나는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봅니다. 교단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도 중요한 진리 때문이 아니라 부차적이지도 못할 세 번째, 네 번째 심지어 스무번 째 정도밖에 되지 않은 지엽적인 문제들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정의하려고 할 때 유념해야 할 크나큰 첫 번째 위험요소입니다.
에큐메니컬 정신에 굴복함
두 번째 위험은, 첫 번째와 정반대의 위치에 놓인 위험입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넓고 개방적이고 느슨해서 결국 정의하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위험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면 오히려 이것이 더 큰 위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교회일치(에큐메니컬) 운동의 시대라 불릴만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릇된 동기로 발생했던 분열들을 죄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견해가 꾸준히 제기돼 왔으며 이것은 정당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반대하되 과도하게 반대해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우침으로써 “기독교 정신만 갖고 있으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위험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교회일치 운동의 경향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과 관련해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일치를 중시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드린 위대한 기도로 그 점을 확립해 놓으셨습니다(요 17장). 신약성경 곳곳에 그러한 교훈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구실로 생각이 해이해져서는 안됩니다. 거짓되고 모호하고 불분명한 에큐메니컬 사고방식에 종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위험을 가중시키고 우리의 입지를 송두리째 위협하는 듯한 요인들이 있는데, 그것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나는 그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라고 봅니다. 이 말을 좀 설명하겠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능한 광범위한 계층으로부터 후원받는 것을 중시했고 그의 동기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는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은 정당한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후원받는 것도 정당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러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 모았습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여러 나라들에서 보았지만,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전도집회를 벌인 뒤에이 문제와 관련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만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전도대회를 치르면서 전에는 서로 잘 몰랐고 스코틀랜드 교회와 관계를 맺은 적도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 겪어 보니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미묘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나 함께 일한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임을 발견했지만 - 혹시 전에는 이 사람들이 뿔이 달리고 긴 꼬리가 붙은 사람들인 줄로 알고 있었을까요? - 문제는 그들의 좋은 성품과 친근함과 형제를 사랑하는 태도에 감화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감화를 받은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니 그동안 우리가 강조해 온 교리들이 과연 그만큼 중요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 우리가 이 사랑의 정신을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협력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레이엄을 비롯한 부흥사들이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이러한 영향을 끼쳐 오면서, 신자들에게 복음주의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확신을 흔들어 왔다고 믿습니다.
그 일이 발생한 또 다른 방식은 내가 영국에서 친숙하게 경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영국 사회에서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 누구나 복음주의자로 간주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데에는 다소 유익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역사를 좀 더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바르트 운동(Barthian Movement)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것을 둘러싼 사건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는 만큼은 나이를 먹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도널드 맥클리언(Donald Maclean)이라는 나이 지긋한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와 또 한 사람이 오늘날까지도 간행되고 있는 <계간 복음주의(The Evangelical Quarterly)로 알려진 간행물을 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간행물은 1920년대에 유행하던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창간된 진정한 복음주의적 출판물이었습니다. 나는 도널드 맥클리언 교수와 만났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이름을 맨 처음 내게 소개해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바르트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내게 심어 주었습니다. 왜 맥클리언이 이 일을 했을까요? 바르트가 옛 자유주의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문제가 얼마나 미묘한지를 잘 알 것입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를 훌륭하게 비판한 까닭에 참된 복음주의자로 평가를 받았습니다만, 물론 그는 한번도 복음주의자인 적이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 영국에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자 복음주의의 강력한 옹호자로 평가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콤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라는 저널리스트가 그 사람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의 컨퍼런스와 전도대회에 자주 초빙되는 인기있는 강사입니다. 지난해 9월에 어떤 복음주의 부흥사가 런던에서 한 달간 전도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주요 강사 중 한 사람을 바로 말콤 머거리지로 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콤 머거리지가 영국성공회를 너무 시원하게 비판하고 주교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행동을 조소할 뿐 아니라 이른바 국교회의 허위와 위선을 통렬히 공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현세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인생을 살던 태도를 청산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그가 펴낸 <재발견한 예수>(Jesus Rediscovered)라는 책을 읽어 본 나는, 말콤 머거리지는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기적들도 사실로 믿지 않습니다. 속죄도 믿지 않고, 문자적인 육체 부활도 믿지 않고, 성령의 인격성도, 기도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주의자들의 컨퍼런스와 집회에 강사로 초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가 일반적인 태도만 변했을 뿐 그후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모호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실상 신비주의자가 되었고, 자신의 신비주의적 견해를 기독교 신앙에 주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시대에, 복음주의자들은 국교회의 자유주의를 공격하고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실제로 믿는 바가 무엇인지 주의 깊에 확인하지 않은 채 섣불리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같은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나는 C.S. 루이스(C.S.Lewis)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거의 수호성인이 되어 있는 현실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주의자인 적이 없었고, 자기 입으로도 자신이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든지 많은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느슨하고 모호한 개념, 궁극적으로 신앙을 배반하고 우리를 더 이상 복음주의자가 아닌 자리로 인도하는 에큐메니컬 정신이 만들어 내는 경향이 복음주의의 두 번째 위험 요소인 셈입니다.
교리가 아닌 성경
다음으로, 세 번째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체험 운동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나는 이것이 오늘날 매우 심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지난 15년 동안 우리를 압박해 온 대단히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미국에서 시작해 많은 나라들에 파급되었고, 오늘날은 대부분의 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주의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필 은사체험 운동을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용어들을 세심하게 정의해야 할 필요에 대한 자각을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현재 그러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의 가르침은 ‘성령세례’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간혹 방언을 자신들의 표준으로 삼기도 하지만, 대체로 ‘성령세례’를 내세웁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몇 가지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은사체험 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데이비드 두 플레시스(David Du Plessis)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은사체험이라고 진술합니다. 이 말로써 그가 전하고자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지루하고 이론적이고 지식을 앞세운 정통신앙이란 헛것이며, 신앙에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신학은 헛되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감으로써, 신약성경의 진술과 교훈을 거스르는 매우 위태로운 자리에 서 있는 셈입니다.
혹시 <카톨릭의 오순절주의>(Catholic Pentecostalism)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읽으셨다면 그 책에도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입니다. 아주 명쾌한 책이지만, 복음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단히 미묘하고 위험한 책입니다. 이 책의 논지는 “우리는 서로 다른 종교적,문화적 배경에 속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인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책의 내용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다수 오순절파 신자들은 감리교 출신들이었다. 감리교 신자들은 대체로 감정을 중시하고 지식은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과도한 감정과 흥분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이 그러하므로 그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문화적 매개를 통해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카톨릭 신자 곧 로마 카톨릭 신자들로서 거대한 교의와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위대한 역사와 성례전적 가르침과 성례전적 삶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령세례’ 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릴 필요가 없으며, 다만 오순절파와 연합하되 그들의 문화적 배경만 버리면 된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은 우리에게 전혀 불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서 ‘성령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성령세례에서 받아야 할 영향은 우리의 교리를 버리고 오순절파가 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위대한 유산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감사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성령세례의 주된 효과가 성모 마리아를 더욱 친밀히 알고 사귐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그 체험이 미사를 비롯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다양한 교리와 교의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교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리를 믿어도 괜찮고, 감리교 신자여도 괜찮고, 혹은 내키지 않으면 아예 교리없이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컨퍼런스나 종교집회에서 사실상 교리가 없어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이러한 견해는 믿음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기술하는 일의 중요성을 훼손합니다. 이러한 견해가 복음주의 진영에 들어오거나 이미 들어왔으며, 복음주의 신자들의 입지 전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재검토해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너무나 절박해졌습니다...
과거의 신자들이 교회에 관해 말해 놓은 내용은 오늘날에도 참됩니다. 과거에 교회가 개혁된 사실이 있더라도 교회는 오늘도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항상 개혁(semper reformanda)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아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교회를 반드시 그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교회가 바르게 출발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후의 교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지 않으면 얼마 못 가서 사뭇 다른 상태로 변질되고 맙니다. 교회를 언제나 말씀 아래 두어야 합니다. 항상 개혁! 항상 개혁을 하되 복음주의라는 표준으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세대 스스로가 이것을 조사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전통만으로는 이러한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복음주의자로 자라났고 지금도 복음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하며, 과거에 작성된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들로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의 당면 문제들을 갖고 있으며, 위대한 신앙고백서들과 신조들도 한곁같이 당대에 대두된 구체적인 문제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작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성경과 역사에 비추어, 특히 이 시대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위험한 경향들에 비추어 새롭게 살피는 것이 우리 세대에 맡겨진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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