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 일본은 있다 … 대참사 앞에서 배려의 ‘메이와쿠문화’ … 세계가 놀랐다

[중앙일보 김현기]

① 대피소의 양보   우동 10그릇, 50명이 서로 "먼저 드시죠"

② 남탓은 안 한다   원망하거나 항의하는 모습 TV에 안 보여

③ 재앙 앞 손잡기   의원들 정쟁 중단 … 작업복 입고 현장으로

④ 침착하고 냉정   일본 전역에서 약탈 보고 한 건도 없어

⑤ 남을 먼저 생각  "내가 울면 더 큰 피해자에게 폐 된다"

뭍으로 밀려 올라온 배들

 


12일 일본 미야기현의 항구도시 게센누마시. 쓰나미에 떠밀려온 대형 선박들이 물이 빠져나간 뒤 건물 틈에 갇힌 채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 대지진 여파로 쓰나미가 덮친 게센누마시는 11일 밤 어선용 연료탱크가 넘어지며 불붙은 기름이 바닷물을 타고 시가지로 번져 도시 대부분이 전소됐다. [게센누마 AP=연합뉴스]

# "오사키니(お先に·먼저 드시죠)", "아닙니다. 전 아직 괜찮습니다."

 규모 9.0의 대강진과 10m가 넘는 쓰나미가 동일본을 덮친 뒤인 11일 오후 6시, 아키타(秋田)현 아키타시의 그랑티아 아키타 호텔. 정전으로 암흑으로 변한 호텔 로비에선 기이한 장면이 연출됐다.

호텔 측이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숙박객을 받을 수 없다"고 안내하자 로비에 몰려 있던 숙박 예약객 50여 명은 조용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노약자들이 앞에 세워졌다. 암흑 속에 일렬의 줄이 생겼다. 순서를 다투는 모습은 일절 없었다. 잠시 후 호텔 측이 "정전으로 저녁을 제공할 수 없다"며 긴급용으로 우동 10그릇을 가져왔을 때다. 우동그릇을 향해 달려들기는커녕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고객의 허기를 걱정하며 뒤로 뒤로 우동을 돌리는 '양보의 릴레이'가 이어졌다. 피해가 가장 컸던 미야기(宮城)·이와테(巖手)현을 비롯, 일본 전역에서 주인 없는 상점에서 약탈 행위가 있었다는 뉴스는 아직 단 한 건도 없다.

 # 도호쿠 미야기현 북동부에 위치한 미나미산리쿠(南三陸) 연안 지역. 마을 대부분이 사라지고 화재로 검게 탄 숲의 흔적만 남아 있다. 쓰나미에 육지로 밀려온 선박은 선미가 하늘을 향한 채 거꾸로 땅에 박혀 있다. 이번 지진의 최대 피해지역인 이곳에선 '실종자 1만 명' 소문까지 돈다. 그러나 고성이나 원성은 들리지 않는다. 피난소에 모인 100여 명의 주민들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빨리 복구가 되길 바랄 뿐"이라면서 "내일"을 말한다. 누구 탓도 하지 않는다. 모자라는 물과 담요를 나눠 쓰며 서로를 위로하는 감동적 장면들이 전파를 타고 있다.

 일본적십자사 조직추진부 시로타(白田) 과장은 13일 "개인과 기업들로부터 성금과 구호물자가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를 향해 늘 으르렁거리던 야당 의원들도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라 구하기에 발벗고 나섰다. 위기 앞에 손잡는 공동체 의식은 일본 사회의 저력이다.

 # 한국에서 재해 보도를 할 때 희생자를 취재하는 건 보통이다. 시신이 안치된 빈소와 병원의 모습이 시시각각 비춰진다. 그러나 일본 대지진 보도에서 일본 언론은 달랐다. 쓰나미로 가옥과 차량이 쓸려 내려가는 장면이 TV에 자주 비쳐지지만 어느 채널에서도 쓰나미에 휩쓸리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죽은 이도 이 세상에 남는다"는 일본인의 특유한 사생(死生)관 때문이지만 울부짖거나 흐느끼는 모습도 좀처럼 화면에서 보기 힘들다. TV아사히의 한 관계자는 "재해 예방을 위한 목적 외에는 일반 시민에게 큰 충격을 주는 화면은 최대한 억제한다는 게 재해 보도의 암묵적인 룰"이라고 말했다. 11일 지진이 발생한 뒤 쓰나미 경계보가 해제된 13일 새벽까지 모든 TV방송 진행자는 헬멧을 쓰고 진행했다. 이처럼 지진 규모나 피해 규모와 달리 일본은 무섭도록 냉정하고 침착하다.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도쿄의 부도심인 신주쿠에 위치한 요쓰야(四谷) 사거리에 있는 소방서. 12층 건물의 10층 언저리 외벽에는 눈에 띄는 선이 그어져 있다. 이 선은 지상으로부터 높이 30m를 알리는 표시다. 그 옆에는 "이 높이는 바로 1993년 홋카이도(北海道) 남서부 지진으로 오쿠시리( < 5965 > 尻)섬을 덮친 쓰나미의 높이"란 설명이 붙어 있다. 쓰나미란 언제 어느 때나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란 걸 인식시키고 평상의 준비가 필수적이란 걸 알리기 위해서다.

 일본인들은 꾸준하고 일관된 재해 대처 교육을 유치원 때부터 받는다. 책상 옆 고리에는 늘 재해에 대비한 머리에 뒤집어쓰는 방재 두건이 걸려 있다. 지진이 발생하면 '방재 두건 착용→책상 밑 대피→운동장 대피→질서 확보'까지 눈 감고도 할 정도다. 철저한 재해 예방 교육은 초등학교 입학 후 첫 수업에서 배우는 "메이와쿠 가케루나(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란 일본 고유의 정신 가치와 함께 대형 재해에 침착히 대응하게 하는 비결이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다가온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특성도 작용한다.

 재해를 당한 일본인들이 크게 흐느끼거나 울부짖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도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폐가 된다"는 극도의 배려정신 때문이다. 재해 현장에서 본 일본의 모습. 그건 "일본은 있다"였다.

김현기 특파원 < luckymanjoongang.co.kr >

◆메이와쿠(迷惑)=

'남에게 끼치는 폐'를 뜻하는 일본말. 일본의 가정·학교 교육과 사회 윤리의 핵심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는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호칭

이번 지진은 일본 도호쿠(東北) 6개 현 을 강타하면서 초기엔 '도호쿠 지진'으로 불렸으나 간토(關東)지방에서도 강한 여진을 일으키면서 동일본거대지진(東日本巨大地震)으로도 통용된다. 중앙일보는 이 지진을 '동일본 대지진'으로 부르기로 했다.

▶김현기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khk93/

주일예배 기도는 슬픈 일본이었다… 전국교회서 위로의 메시지 이어져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10313175415565

출처 :  [미디어다음] 문화생활 
글쓴이 : 국민일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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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나에게 은총입니다”

매일경제 | 입력 2010.03.30 15:17

 

< 약력 >

1944년 경기도 부천 출생.

1997년. 최우수 예술인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1년.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 입학

2005년.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 대학원 입학

2006년~ 국가암정보센터 홍보대사

2008년~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홍보대사

2010년 원광대학교 보건학 박사

출연작 < 산국 > < 위기의 여자 > < 세일즈맨의 죽음 > 등 150여편의 연극과 TV 드라마 < 아내와 여자 > , 영화 < 결혼은 미친 짓이다 > < 님은 먼곳에 > < 불꽃처럼 나비처럼 > 등 다수

저서 < 쌍코랑 말코랑 이별연습 > < 내 인생의 길목에서 > 등

"이 병은 나에게 은총이에요. 살아있는 것만이 은총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에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해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의 귀함에,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암은 나에게 특별합니다."

뺨에 홍조를 띠고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짓는 그녀는 예순일곱의 배우 이주실.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 밑까지 내려뜨린 그녀는 마치 소녀 같았다. 다행이었다. 정말 시한부 선고를 받았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건강해 보였다.

1993년 그녀는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벌써 17년 전 일이다. 그 때 의사는 그녀가 1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암 세포가 늑골 뼈까지 전이돼 완치가 불가능하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시간을 꿋꿋하게 버텨내고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천사가 되어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 "연극에 대한 끝없는 집념이 저를 살렸죠"

"끔찍한 고통을 눈 감을 때까지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때가 많았습니다. 온 몸이 찢기는 느낌, 정말 견디기 힘들었죠. 특히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주사바늘이 들어감과 동시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지는 듯한 통증이 저를 덮쳤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통증도 문제였지만 아직 학생인 딸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목이 메어왔다. 그녀의 병을 알게 된 딸들은 어느 날부턴가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 가지마. 죽지마.' 엄마가 죽는 꿈을 꾸면서 밤새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녀는 용기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게 그녀는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연극에 도전하기로 했다. 무대에 설 수 있는 약간의 힘이라도 남아 있다면 사람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배우 이주실'이라는 이름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우로서 '잘 나가던 시절'에는 찾지 않았던 지방 곳곳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배우는 그녀 1명, 스텝은 단 둘 뿐이었다.

"항암치료 때문에 몸무게가 35kg 정도까지 줄어서 무릎에 힘이 너무나 없었어요. 90분짜리 연극을 감당하기가 정말 힘들었죠. 하지만 무대에서 설령 쓰러진다 해도 지금까지 저를 아껴줬던 분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건 이 길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더라고요."

◆ "봉사활동, 그건 중독이에요"

"처음에 1년 동안만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연극을 하다 보니 어느새 2년이 흘렀더라고요. 그래서 인간의 에너지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따뜻해졌고 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게 됐어요. 봉사활동, 그건 중독이에요."

그녀의 봉사활동 경력은 40여년. 홀트재단에 익명의 성금을 내면서부터 지금까지 꽃동네, 소록도, 동두천 기지 주변 등을 찾아다니며 나병환자나 기지촌 여성 등과 함께 생활했다. 주변의 무관심 속에 '반항아'라는 낙인이 찍힌 아이들을 돕고자 대안학교와 소년원을 찾기도 했다. 봉사활동이 이미 몸에 배인 그녀에게 투병 중 생긴 시간적 여유는 오히려 봉사활동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암 세포는 눈에 보이니까 집중공략해서 치료할 수도 있지만, 마음의 병은 해결할 도리가 없잖아요. 누가 옆에서 도움을 조금 줄 뿐이죠. 그런데 눈을 크게 뜨고 보니까 이 세상에는 마음의 병이 깊은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요."

◆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 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암에 붙들린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이렇게 인사를 건넵니다. 이제는 암이 죽음에 이르는 병도 아니고, 절망의 대상도 아닙니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마음이에요.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여러 고통을 겪잖아요. 암도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죠 뭐."

'이주실 요법'. 투병 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하루를 10년처럼 살면 된다'며 굳건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암을 극복해내자 주변 사람들이 만든 용어다.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목표로 삼은 그 무언가를 향해 매진할 때 암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녀는 연극, 뮤지컬,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배우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가암정보센터와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등에서 홍보대사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더 이상 병원도 찾지 않는다.

배움에 대한 열정도 남김없이 발휘했다. 지난 2001년에는 쉰여섯의 나이에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에 입학해 복지심리학 공부를 했고, 졸업 후에는 같은 대학 대학원 임상사회사업학과에서 배움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난 달 19일에는 원광대학교 보건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처음에는 많이 괴로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랜 세월을 암과 같이 놀면서 지냈네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기왕에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툭툭 털고 한 번 부딪혀보자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제 많은 암 환자들에게 제가 희망의 증거가 되어 드릴 겁니다."

[이상미 MK헬스 기자 lsmclick@mkhealt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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