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달러 시대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1만달러 때보다 행복하지 않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가 왔다. 우리는 소득이 늘어나면 행복도 비례해서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행복감은 1만달러 시대보다 떨어졌다. 환율이 떨어져 소득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환율 착시’현상으로 기대 수준만 높아졌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등 고용 불안으로 인해 무한 경쟁에 빠지게 된 직장인들은 삶의 여유를 찾기 힘들어졌다.
집값이 오르고 교육비가 늘어나면서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급증했다. “나는 행복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중산층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는 소득이 늘어난 만큼 행복이 늘어나는 나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까?
직장생활 10년차의 오모(37)씨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표준적인 연봉을 벌고 있다. 혼자 벌어 4인 가족을 먹여살리는 그의 연봉은 7500만원이다. 달러로 따지면 약 8만달러가 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라는 것은 4인 가족으로 따지면 8만달러의 소득이다. 하지만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보다 연봉이 4배가 올랐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다”며 “그때는 한 달에 몇 십만원씩 저축이라도 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오씨는 1년 전 아내와 8살, 5살 된 두 아이를 호주로 조기 유학을 보냈다. 오씨가 한 달에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로 송금하는 돈은 400여만원. 여기에 주택담보대출 이자가 월 100만원씩 꼬박꼬박 나간다. 자기 생활비 조금 쓰다 보면 손에 남는 돈은 없다. 처음엔 원래 살던 집은 세를 주고 월세로 원룸에 살려고 했지만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부모님 집에 얹혀 살고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아이들을 외국에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하지만 오씨와 같은 사람들은 정작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가 왔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 7월 올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70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추정했다. 경제성장률이 4.5%를 기록하고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925원을 유지한다는 가정 아래서이다. 정확한 통계는 내년 3월쯤 한국은행에서 발표하지만 한국은행과 각종 민간 연구소들은 올해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서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5%에 육박할 것으로 보이고 원·달러 환율은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1인당 국민소득은 1만8372달러였다.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한 것은 1995년 1만달러 대를 돌파한 이후 12년 만의 일이다. 과거에 2만달러를 달성한 나라들은 평균 10.1년이 걸렸다. 최단 기간에 1만달러에서 2만달러를 달성한 나라는 이탈리아(5년), 싱가포르(5년)이고 최장 기간은 호주(16년)다. 한국은 1997~1998년 외환위기를 거친 것을 고려하면 기간만 따지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성적표다. 하지만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으로 한국인들이 행복해졌나’를 따지기 시작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작년 7월 영국의 민간연구소인 신경제재단(NEF)은 세계인의 행복을 비교하기 위해 ‘행복지구지수(Happy Planet Index)’를 만들어 발표했다. 행복지구지수는 주관적 삶의 만족도에 객관적 기대 수명치 등을 반영해서 산출한다. 그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구지수는 41.11점이었고, 순위는 세계 178개국 중 102위였다. 미국이 150위, 일본이 95위인 것을 보고 지수가 국민소득과는 큰 연관이 없다는 시각도 있으나 한국의 행복 순위가 높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 레스터대학의 애드리안 화이트 교수가 발표한 세계행복지수 순위를 봐도 한국은 세계 178개국 중 102위였다. 이 순위에서 미국은 23위, 일본은 90위였다.
한국인은 주관적인 태도를 묻는 조사에서 “행복하지 않다”는 대답이 많을 뿐더러 늘어나고 있는 경향이다. 주관적인 삶의 만족도는 미국 미시간대학의 로널드 잉글하트 교수가 주도하는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 결과는 앞서 언급한 신경제재단의 행복지구지수의 주관적 삶의 만족도 부분에 그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세계 가치관 조사의 한국 내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인은 국민소득 1만달러를 갓 넘겼던 10년 전에 비해 현재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5~2007년에 걸친 조사에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65.93점으로 세계 평균(69점)에도 못 미쳤다. 순위는 37개국 중 28위였다. 같은 조사를 1995~1998년 했을 때에는 66.04점으로 24개국 중 15위를 기록했다. 절대 점수도 떨어지고 순위도 하락했다. 세계 가치관 조사의 행복지수는 ‘매우 행복’ ‘약간 행복’ ‘약간 불행’ ‘매우 불행’ 등 4개 항목의 응답에 대해 가중치를 두고 평균을 내서 만든다.
객관적 지표를 가지고 행복지수를 낸 경우에도 행복지수가 1만달러 시대에 비해 떨어졌다는 결과가 있다.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실을 통해 받은 도이치뱅크연구소의 ‘국가별 행복지표’ 보고서에 따르면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2개 나라 중에서 한국만이 유일하게 지난 10년 사이에 행복지수가 떨어졌다. 도이치뱅크연구소는 국민 간의 신뢰도, 부패수준, 출산율, 경제자유도 등의 지표를 종합해서 행복지표를 계산했다. 한국은 1인당 소득은 늘어났지만 출산율이 최하위로 떨어지는 등 행복과 관련한 지표는 떨어졌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가 왔음에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의 많은 부분이 원·달러 환율 하락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소득이 늘어난 만큼 나타났어야 하는 행복감보다는 실제 소득 증대로 늘어난 행복감은 적은 ‘환율 착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2000년 이후 1인당 국민소득은 83.8%가 증가했는데 그 중 30.5%포인트가 환율 하락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질소득 증가의 영향은 38%포인트에 그쳤다. 그 이전까지는 환율은 국민소득을 감소시키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환율 하락의 기여도가 높은 게 한국만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86년 이후 불과 5년 만에 1만달러 국가에서 2만달러 국가로 탈바꿈했다. 연평균 성장률이 2.6%밖에 안 됐지만 이탈리아 리라의 가치 상승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1만달러 국가에서 2만달러 국가로 이행하는 중간에 1985년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고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한 선진국 간의 ‘플라자 합의’가 있었다.
그렇다면 행복감이 떨어진 것은 ‘환율 착시’ 현상 때문만은 아니다. 송병락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국민소득 2만달러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정보기술(IT)·조선산업 등 보통사람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산업이어서 성장의 열매를 골고루 맛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산층의 불만이 늘어난 것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원인이다. 우선 중산층의 수가 줄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1996년 55.54%였던 소득 중간층은 외환위기 사태 직후인 2000년 48.27%로 감소했다가 2006년 상반기에는 43.68%로 더 줄었다. 소득 중간층은 소득 수준이 중간값 기준으로 75~150%인 계층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4~2006년 가계 경제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상류층과 저소득층의 만족도 눈에 띄게 증가한 반면 중산층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월평균소득과 삶의 만족도 관계를 따져본 결과에는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월 소득 200만~500만원인 경우가 하류층이나 상류층에 비해 만족도가 낮았다.
저성장기에 대한 부적응 현상도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나성린 한양대 경제금융학부교수는 “고성장 시대에는 일자리가 많았지만 저성장 시대에 오면서 일자리도 줄고 비정규직 등이 늘어나면서 고용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며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 찌들다 보니 누구나 바쁘고 괴롭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를 넘어가면 소득 증가가 행복과 비례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 국민소득 1만3000달러에서 1만5000달러까지는 소득 수준에 비례해서 행복 수준이 증가했지만, 1만5000달러가 넘어가자 소득과 행복의 관계가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 미국에서 ‘행복하다’고 대답했던 비율이 70%였는데, 이 비율이 1960년대까지 90% 이상으로 증가하다가 2000년대에 와서는 60%로 떨어졌다. ▒
1인당 국민소득과 1인당 국민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은 국민총소득(GNI)을 인구 수로 나눈 것이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국민총생산(GDP)을 인구 수로 나눈 것이다.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생산한 순수한 가치가 GDP다. GDP에서 무역으로 인한 손익을 더하거나 뺀 게 GNI이다. 정확한 의미상 1인당 국민소득은 GNI를 사용해야 하지만 대외 거래가 많지 않은 국가는 GNI와 GDP가 거의 같고 GNI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데는 시차가 있어 국제적인 비교에서는 1인당 국민총생산(GDP)을 주로 사용한다.
행복경제학이란
‘행복지수’ 연구… 국가 정책에도 영향
기존 경제학 이론은 행복을 효용(utility·인간이 느끼는 만족)으로 정의하고, 효용을 주는 재화와 서비스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경제학에서 행복 자체에 대해 분석을 하는 행복경제학(Happiness Economics)이 새로운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는 분석 도구인 ‘행복지수’를 만드는 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직 행복지수를 어떻게 만들지 정립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분석한 결과의 편차가 크다. 재미있는 것은 한 국가 내에서 비교할 때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국가 간 비교를 할 때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나라 국민이 부자 나라 국민보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작년 6월 신경제재단이 발표한 순위에서 1위를 한 나라는 호주 인근의 작은 섬나라인 바누아투였다. 이를 발견한 학자의 이름을 따서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가 간에도 돈과 행복의 관계가 일치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여론조사회사인 갤럽이 올해 7월 130개 나라 국민에게 “당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행복도 1위는 북유럽의 부국 핀란드가 차지했고, 미국·유럽·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의 국민이 대체로 아프리카 등 저소득 국가보다 행복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높았다.
행복경제학은 국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제러미 벤덤의 공리주의 전통이 남아 있는 영국에서는 2002년부터 정부에서 ‘삶의 만족도(life satisfaction)’라는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영국 보수당수 데이비드 캐머론은 국민의 행복을 측정하는 ‘일반 웰빙 지수’의 도입을 촉구하기도 했다. 태국은 2006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국가 목표로 삼고 매달 총국민행복지수(Gross Happiness Index·GHI)를 발표하고 있다. 호주·캐나다·중국 등도 정부 차원에서 행복지수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취임 직후 ‘7% 성장’ 공약 버리고 ‘2만달러’로 전환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 전략을 국가 비전으로 제시한 것은 취임 후 4개월이 지나서였다. 노 대통령은 2003년 6월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서 “국가 전체를 개조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선언을 했다. 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는 2만달러에 대한 얘기가 없다. 단지 ‘잠재성장률 7% 성장’이라는 공약이 있었을 뿐이다.
노 대통령은 2만달러 전략을 내세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 7월 초 대전청사 공무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돈을 국가 비전으로 내세우기가 좀 그래서 지난 대선 때 2만달러 시대를 공약으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환율의 함정’ 때문에 2만달러를 공약으로 내걸지 않았다”며 “(1995년) 높은 원화 가치를 통해 억지로 1만달러를 만든 뒤에 (외환위기 때) 금방 본전을 드러냈다”는 말도 했다. 원화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져서 자동적으로 소득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비전을 내세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국민은 간단한 걸 좋아하고 쉽게 감을 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연간 5% 성장하면 우리 경제가 2015년이면 2만달러에 도달할 수 있지만 환율에 따라서는 2011년에도 가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 해 8·15 경축사에선 “10년 이내에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소득 2만달러’라는 구호가 처음 등장한 곳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었다. 노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당선자에게 “민관 합동의 ‘국민소득 2만달러 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대통령 취임식 날인 2월 25일에는 여의도 전경련 건물에 ‘새 정부와 함께 2만달러 시대를 열어갑시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노 대통령이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을 국가 비전으로 제시한 후 2004년 들어서는 대한상공회의소, 삼성경제연구소 등 민간 기관들이 2만달러 달성을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잇따라 내고 각종 심포지엄 등을 통해 분위기를 띄우는 모양새를 보였다. 때문에 노동계와 진보 학계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2만달러론은 ‘재벌에 대한 백기 항복’이다”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또 2만달러 시대라는 비전 제시가 7% 성장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자 국민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결과적으론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 3~4%대의 저성장이 반복됐음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이 피하고자 했던 ‘환율의 함정’ 덕분에 조기에 2만달러 시대가 도래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 방현철 기자 banghc@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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