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N. T. Wrigh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London: SPCK, 2003.
라이트 교수의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라는 총서의 세번째 책이다. 책의 부피가 점차 그 한계를 넘어설 지점에 다다를 정도로 라이트 교수는 이 세번째 책(RSG)에서 '부활'의 주변부와 핵심을 치밀하게 논한다.
예전에 무협드라마였던 '달빛자르기'에서와 같이, 그동안 (자신이 말하기를 환원주의적인 역사비평과 그 방법론적인면에서 차이를 분명하게 선언한) 순수-역사적인 해석의 방법론을 고집했던 저자는 '부활'의 역사성을 '태양을 향해 (활을) 쏴라!'와 같은 문제로 표현한다. 드라마에서 검법을 깨달은 검객은 물속에 비친 달빛을 단칼에 베어낸다. 마찬가지의 방법론을 저자는 제시한다. 과거의 유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역사라는, 본질적으로 '역사의 만유인력'에 의해서 태양을 향해 활을 쏠 수는 없기 때문에, 호수에 비친 태양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역사의 합리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헬라문화라는 거대담론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호머의 작품(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을 비롯한 헬라문학과 플라톤의 헬라철학에서 표현된 사상속에는, 물론 저자는 죽음과 그 이후의 사상이 복잡하게 발전했음을 보여주지만(재앙으로서의 죽음[아킬레우스의 슬픔]과 해방으로서의 죽음[소크라테스의 평온](RSG, 108)), 결론적으로 헬라의 죽음은 '부활의 불가능과 부활 그 자체의 낯설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RSG, 152). 헬라사회안에서 부활을 논한다는 것은 교회안에서 ET를 논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헬라사상과 비교할 때, 구약에서 시작한 유대교의 사상은 부활에 대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저자는 구약에 부활을 해석할 수 있는 표현들을 논한다(RSG, 200-15): 단 12:2-3; 사 52-3장; 사 26:19; 호 13:14; 호 6장; 겔 37장. 이러한 본문에서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몸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발생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서의 삶, 야웨의 선물로서의 삶의 소망이라는 측면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부활은 현실극복(순교)을 가능케하는 상급이다(RSG, 246). 이것은 LXX의 기록자에게도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 것임에 분명하다(RSG, 255). 한편, 부활은 그 역사적 맥락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내포하게 되는데, 현실을 이겨내는 신앙인에게 의의 심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RSG, 271). 이어서 저자는 요세푸스(RSG, 305)와 쿰란(RSG, 318)까지도 풍성하게 다룬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저자는 중간상태의 대중적인 신앙을 제시하며(RSG, 327), 야웨가 행할 부활의 역사에 대한 신앙('제삼일')이 저류에 흘렀음을 제안한다(RSG, 334). 결국, 유대교안에서 부활은 은유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 문자적인 의미에서 '인간 몸의 회복'으로 구체화되지만, 두번째의 경우에 유대교는 '죽음 직후의 운명이 아니라, (더 이후의 장차) 사후의 삶의 두번째 단계일 뿐'이었다고 논한다(RSG, 341).
이제 저자는 부활 신앙의 전도자였던 바울을 논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역사적인 차원에서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석의를 통해서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영/육'의 이분법을 경계한다(RSG, 554). 왜냐하면 바울의 오독이야말로 육체에 대한 오해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교 사상에 '두단계의 부활(예수와 백성)'과 '몸의 불연속성(썩지않음과 성령의 새사람)'을 더한다(RSG, 569,587). 이렇게 바울이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논쟁이 되는 그의 체험에 달려있다. 저자에 의하면 사도행전의 극적인 체험의 서술은 청중을 위한 표현이었던 것이며(그러므로 김세윤과 다르다, 607), 일종의 인식론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다(RSG, 626).
저자는 복음서에서 천국의 오해를 해소한다(RSG, 657): 천국은 의인들이 죽음이후/직후에 가는 통상적인 명칭이 아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복음서의 부활 주장이 1세기 유대교의 스펙트럼안에서, 굳이 말하자면, 바리새파 신학과 동일한 자리에 있다고 평가한다(RSG, 682). 그러면서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재형성된 신학이 발전했는데, 앞선 바울의 주장과 같이 몸의 부활과 별개의 사건(예수-백성)이 그것이다(RSG, 688-9). 한편, 저자는 예수의 부활이 복음서 저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분석에서 잘 드러난다(RSG, 690,700). 결론적으로 바리새파의 그것이었지만, (1) 두단계의 부활과 (2) '트랜스피지컬(transphysical)'이라는 몸의 성격으로의 발전이 복음서가 말하는 부활이다(RSG, 746). 그러므로 정경을 벗어난 글들의 죽음/사후의 사상은 정통신앙에 걸러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RSG, 839, 854):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단언하며, 이로 인해서 몸과 행실의 거룩함을 주장할 수 있었다(RSG, 861). 부활은 신앙의 변형을 일으켰다: 인종적 특수성이 상실되며, 악과 대결한다는 메시야적 전투의 성격으로,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로서의 재건된 성전, 전체의 갱신을 통해 부어질 하나님의 공의로서의 메시야의 구원으로 완성되었다(RSG, 877). 이런 의미에서 야웨와 예수는 그 칭호가 구별됨(고전 8:6, 데오스와 퀴리오스)을 발견한다(RSG, 890). 저자는 예수의 부활이 가져왔던 역사적 실제의 변화를 강조한다: 부활은 정치적이며, 실제적인 도전임에 분명하다(RSG, 898-904). 마지막으로 저자는 부활 이야기가 서로 불일치한다는 학계의 딴지를 순수하게 역사적인 개연성의 발견이라는 논리로 지나간다(RSG, 949). 사복음서에서 '부활의 안경'으로 예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귀중한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은폐가 아닌 계시와 복음으로서의 마가(RSG, 977), 철저하게 유대적인 맥락에서 지진과 천사들의 의미를 제시한 마태(RSG, 999), 마땅히 일어날 일의 완성으로서의 누가(RSG, 1009),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요약되는 요한(RSG, 1038).
저자는 기독교의 기원이 부활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1) 빈무덤과 (2) 부활의 현현이 필요충분조건을 이룬다고 정리한다(RSG, 1073). 부활은 메시야라는 소망의 성취이며(RSG, 1118), 로마의 황제가 아닌 참된 주가 새로워지는 충성의 대상의 발견이며(RSG, 1123), 하나님과 동등됨의 표현인 '하나님의 아들'됨이 선언되는 선포이다(RSG, 1129).
이렇게 저자는 순수한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서 부활의 실재성과 그 의미를 개진한다. 저자에 의하면 태양을 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도 역사적인 방식으로 태양을 쏘는 것은 가능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기원은 그 출발이 합당한 시작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다시금 바울에게로 바통이 넘겨지게 된다. 기독교의 시작이 발견되었으므로, 이제 기독교의 중요 사상으로 여겨지는 '이신칭의'가 바로 다음의 주제가 될 것이다.
거대한 산맥을 돌파하고 난 이후, 드디어 정상을 정복했다고 여길 때, 등반가는 과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자신이 과연 정상을 정복했을 때의 감격을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 진정한 등반가는 정상위에서 겸손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은 정말 묵상을 위한 책임에 분명하며, 기존에 굳어졌던 성서해석에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의 여지가 여전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 책임에 분명하다. 등반가는 내려오면서 더 높은 산을 계획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반가는 이제 바다를 찾지 않을까?(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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