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다반사 !/Think again !

‘뇌사 경찰관’ 아내의 눈물

발로뛰는 김대표 2007. 3. 27. 14:48

‘뇌사 경찰관’ 아내의 눈물


 

2004년 6월 2일 밤. 수원중부경찰서 서호지구대 야간근무조에 긴급 지원요청이 접수됐다. ‘서호지구대 관내 식당에서 만취한 채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데 2차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서호지구대의 야간근무조 4명은 현장으로 2차 지원을 나갔다. 이날 지원을 나간 야간근무조에는 장용석 경장이 있었다.

피의자는 근처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전과 13범. 이 피의자는 180㎝가 넘는 장대한 체격이었다. 출동 경찰관들이 현장에서 피의자를 제압한 뒤 식당 주인을 상대로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있는 동안 장용석 경장은 늘 해온 대로 피의자에게 미란다(miranda)원칙을 고지(告知)하기 시작했다.





“피의자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
순간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장용석 경장이 나동그라졌다. 미란다 고지를 하던 중 피의자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동료 경찰들이 달려들어 다시 피의자를 제압했다. 그러나 장용석 경장은 일어나지 못했다. 기습을 받아 뒤로 넘어지면서 뇌출혈을 일으킨 것이다.
장용석 경장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아내와 세 살짜리 아들, 돌을 막 지난 딸을 두고 있는 건실한 남편이자 아빠였다. 장용석 경장은 즉시 병원으로 후송되어 뇌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장용성 경장은 경찰청 내규에 따라 6개월간 공무상 병가기간을 가졌다. 이후 다시 1년간 휴직기간을 갖는다. 하지만 한 번 손상된 뇌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장용석 경장은 경찰 내규에 따라 지난해 3월 24일 경찰청에서 직권면직 처분을 받게 될 처지가 되었다. 직권면직 처분을 받기 직전, 일부 방송에서 장용석 경장의 딱한 소식을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간 이후 1개월의 유예기간이 지나 직권면직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제 장용석 경장은 더 이상 경찰관의 신분이 아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장용석 경장은 서울 길동 보훈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나이 서른일곱.



부인 황춘금(33)씨는 매주 토요일 오후 직장을 끝내고 보훈병원을 찾는다. 부인 황씨가 일을 끝내고 두 아이를 맡긴 뒤 1시간 가량 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하는 시각은 오후 5~7시. 황씨는 간병인과 교대한 뒤 다음날 간병인이 돌아올 때까지 병실에서 남편 곁을 지킨다.

일주일 전쯤 기자는 황씨와 3월 10일 토요일 오후 5시 병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약속 확인 전화를 했을 때 황씨는 “회사 특근 때문에 5시쯤에 끝나는데, 아이들을 맡기고 오면 7시쯤 병원에 도착할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7시쯤 병실을 찾았을 때 부인 황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장용석 경장이 입원 중인 병실은 중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방이다. 대부분 연로한 퇴역 군인이나 경찰이었다. 장용석 경장처럼 젊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장용석 경장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도무지 전신마비 상태의 중환자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도 못하고 음식물도 입으로 삼키지 못한다. 음식물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호스를 통해 체내에 투입한다. 초점 잃은 눈빛으로 누워있는 서른일곱 살의 남자. 기자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남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진다. 이런 남편을 지켜봐야 하는 아내의 심정은 어떨까. 

이때 부인 황씨가 병실로 들어섰다. 부인이 남편 곁으로 다가가 기자 일행을 가리키며 “자기야, 이분들이 누구야? 누구 오셨어?”
남편의 눈동자는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는 침대 시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남편의 배를 쓰다듬는다.
“배가 임산부야, 임산부. 자기 나를 봐!”
그제야 남편은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싱긋 미소를 던진다.
“저 보면 좋아하고 웃고 그래요.”

아내는 다시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악수하자.”
남편은 슬로 모션처럼 왼손을 들었다.
“2개월 전만 해도 아주 힘겹게 손을 올렸는데, 지금은 그래도 빨라졌어요.”
아내는 남편의 상태에 대해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한 번 죽은 뇌는 다시 살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라고 합니다.”
뇌사 상태의 환자들이 대개 그렇듯 폐렴, 방광염 등 갖은 합병증이 엄습한다. 아내는 “감기만 걸려도 이게 폐렴으로 나빠진다”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을 1999년 소개로 처음 만났다. 1995년 2월 경찰후보생 73기로 경찰에 투신한 남편은 서울경찰청 서부경찰서와 은평경찰서를 거쳐 정부중앙청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내의 직장은 수원에 있고, 남편의 직장은 서울에 있어 두 사람의 데이트는 중간 지점인 여의도와 영등포에서 주로 이뤄졌다. 두 사람은 2000년 4월 결혼했다.

병실은 6인실이라 몹시 비좁았다. 환자 옆에 간병인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공간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취재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황씨와 함께 병실 밖 복도로 나갔다.
병실 특유의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느긋하고 달콤한 휴식에 빠져있을 토요일 밤이라 더 그런가. 주말 밤마다 의식불명인 남편을 만나기 위해 수원에서 보훈병원으로 달려와야 하는 젊은 아내.


“많은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던져요. 병원을 올 때 무슨 생각이 드냐고. 그 질문이 가장 듣기 싫어요.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하기가 싫어요.”
황씨는 “회사 측에선 제 사정을 알고 많은 배려를 해준다”고 했다. 황씨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주말마다 두 아이를 맡기는 일이다.
“오늘은 셋째 형님이 집에 오셨어요. 형님께서 아이들에게 잘해 주셔요. 하지만 아이들은 주말마다 엄마와 헤어지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아내는 남편이 의식불명이 된 후 1년 반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보내야만 했다. 졸지에 평화로운 일상이 깨어지고 모든 고통을 혼자 짊어져야 했다.
“사고가 난 직후 동료 경찰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위로금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남편은 현재 보훈대상자가 되어 보훈병원에 입원 중일 때는 병원에 따로 내는 돈은 없습니다.”


현재 아내 황씨는 보훈처로부터 받는 지원금으로 생활을 한다. 간병비 160만원, 기타 비용과 교통비 명목으로 약 40만원이 든다. 두 아이 유치원비로 지출하는 돈은 50만원. 장용석 경장은 경찰 경력이 20년이 채 안 되어 연금수령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장 경장이 직권면직 되는 날 10년 이하도 연수(年數)에 준하는 연금지원이 가능토록 하는 공무원 특별법개정 법안이 통과되었다.
황씨는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까 정부 행정이 앞뒤가 맞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직권면직 날짜는 정해져 있었는데 누구 하나 면직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법이 그렇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청와대에서도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기자회견까지 했지만 말뿐이었다. 아내는 책임있는 사람으로부터 “힘내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솔직히 인터뷰에 응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내 남편 이야기가 알려지니까 무슨 엄청난 정부 지원을 받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사실은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일단 이렇게 말해버리고 나자 아내는 분을 삭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병원 측은 3월 24일까지 병실을 비워달라고 합니다. 대기 환자가 많아 장기환자를 계속 입원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수원 집 근처에는 보훈병원 지정병원이 두 곳밖에 없습니다. 제가 병원을 선택할 수도 없죠. 저희들의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이 나라의 사정 때문에 나가야 되는 겁니다. 최소한 남편과 직접 연계된 병원 문제라도 나라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황씨는 경찰관의 아내이자 직장인으로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사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사고를 당한 후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와 외롭게 투쟁하고 있다. 아내는 절규하듯 외쳤다.
“높은 사람들이 내 눈물 한 방울이라도 알고 있나요? 뭐는 순직(殉職)이 아니라서 안 되고, 뭐는 남편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애들이 저렇게 어린데, 애들이라도 다 키워놓고 이런 일을 당하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아요. 남편은 목숨을 걸고 나가서 저렇게 됐는데. 미란다 고지를 앞장서 할 필요도 없었지만, 직무에 충실하다가 이렇게 됐는데 그 책임이 저희들의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곤 아내는 눈물을 훔쳤다. 토요일 밤, 병원 복도에서 인간으로서 가장 인내하기 힘든 고통의 장벽과 마주하고 있는 여성. 그를 보고 있는 것도 괴로웠지만 그에게 말을 시키는 일도 솔직히 못할 노릇이었다.

 

“금요일 밤만 되면 아이들은 엄마와 같이 있고 싶다고 울먹입니다. 남들은 아이들과 동네 공원에서 노는 게 아무 일도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보통 큰 맘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우리 애들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제가 눈물만 글썽여도 금방 달려와 ‘엄마, 울지마! 우리가 말 잘 들을 게요’ 하며 저를 위로합니다. 애들 생각하면 ‘내가 강해져야지’ 하다가도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내는 또다시 목이 잠겼다.
“경찰인 남편 만나서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내 아이들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제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