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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논술의 종말

발로뛰는 김대표 2007. 3. 2. 14:09

[커버스토리]강남논술의 종말






학생들이 논술시험을 치르고 있다.


논술학원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정형화 된 벼락치기 암기형 글쓰기 입시서 외면당해

믿던 ‘강남논술’에 승부 걸었던 학부모·학생들 허탈


서울대학교는 2007년 정시모집 논술시험에서 대한민국 교육1번지인 서울 강남에서 공부한 학생들보다 사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는 군(群)지역, 이른바 시골 학생들의 논술 점수가 가장 높았다고 발표했다. 또 논술시험 전부터 서울대 핵심 입시관계자는 “서울대가 학원식 논술에 철퇴를 가할 것”이라며 “학원에서 논술을 배운 학생들은 절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것이며 논술학원 다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대학교는 논술이 지원자를 평가하는 데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지 못해 2008학년도 입시부터 논술시험의 비중을 대폭 낮추겠다고 밝혔다. 올해 연세대학의 논술 채점을 담당했던 한 교수는 ‘누가 잘 썼는가보다 정형화된 강남 논술학원 답안을 가리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산골에서까지 서울로 논술 유학을 오게 만들고 TV 광고까지 할만큼 ‘학원재벌’로 부상한 강남 논술학원의 신화가 무너지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유치원 논술교육까지 시장이 확대되고 패스트푸드나 미용실처럼 프렌차이즈학원까지 만든 강남의 논술학원이 이렇게 허물어지는 이유는 뭘까. 서울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강남 논술학원들의 교육법이 도마에 올랐지만, 수험생과 교사·학부모들은 각 대학이 제시한 논술문제나 채점의 공정성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전국을 광풍으로 몰아넣은 대입논술, 과연 강남 논술학원의 신화는 막을 내릴지, 논술시험 출제와 채점을 담당했던 교수들은 어떤 입장인지 곳곳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정준호씨(51·서울 강남구 압구정동)는 요즘 잠을 못 이룬다. 학교 성적도 좋았고 착실해서 그의 자랑거리였던 외동딸이 올해 대학입시에서 완전히 낭패를 보았기 때문이다. 연·고대는 너끈히 들어갈 것으로 믿었던 딸아이는 가나다군 가운데 안전장치로 응시한 시시한 대학에 겨우 붙었다.

“내신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특히 아이가 다니던 논술학원에서는 딸애의 논술실력이 아주 뛰어나다며 대학생이 되면 조교로 채용하겠다고까지 했어요. 논술로 승부를 보자며 수능 공부보다는 논술에 치중했죠.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꽝’이었어요. 원하던 대학에 떨어진 딸아이는 울고불고 재수를 하겠다고 하지만 내년부터는 입시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니 선뜻 재수를 권하기도 힘들어 일단 등록은 했어요. 아이가 그동안 써둔 논술을 봤더니 그게 가장 전형적인 강남형 답안지라는군요. 왜 하필 올해부터 강남형 논술답안이 수모를 당하냐구요….”

땅이 꺼지듯 한숨 쉬는 정씨의 우려대로 2008년도 입시는 수험생과 학부모들 사이에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불린다. 대학입시제도가 달라져 수능만이 아니라 내신과 논술의 비중이 높아져 내신·수능·논술의 3중고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논술의 경우 통합교과형 논술을 도입하는 대학이 늘면서 그동안 논술고사를 보지 않던 자연계 학생들은 물론 문과학생들조차 어떤 입시전략을 짜야 하며 논술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게다가 ‘강남논술학원’이 배척당하는 분위기여서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대입논술 ‘강남형 답안지’에 철퇴

서울대 측은 논술시험 전부터 “강남 논술학원 유형의 답안을 쓰면 손해볼 것”이라고 호언을 했고 실제로 특목고 및 서울 강남지역 고교 졸업생들의 대입 논술 점수와 일반 고등학교 졸업생들 사이의 논술 점수 격차가 크지 않다는 분석 결과도 줄줄이 나왔다.

고려대는 2007학년도 정시 인문계열 합격생 1112명의 논술 점수를 분석한 결과 외국어고 졸업생들이 평균 97.51점을 받아 서울 일반고 졸업생(97.37점), 지방 일반고 졸업생(97.21점)에 비해 불과 0.3점 높은 점수를 받는 데 그쳤다고 밝혔다. 지역별 일반고 졸업생들의 논술 평균 점수는 충북(97.52점), 대구(97.51점), 울산(97.48점)이 외국어고(97.51점)와 비슷하거나 높았다. 부산(97.01점), 광주(96.99점), 경북(96.83점) 학생들의 점수도 외국어고 졸업생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서울 강남(97.45점)과 강북(97.30점) 학생들의 평균 점수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고려대 박유성 입학처장은 “교육부가 영어 지문 금지 같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2006학년도부터 논술 변별력이 현저히 낮아졌다”며 “2008학년도 입시부터는 논술 최고점과 최저점 차이를 좁힐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 달에 수십만 원, 족집게 논술 과외의 경우 수천만 원씩 지불해가며 논술지도를 받아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학원재벌의 신화, 논술광풍의 주인공인 강남 논술학원이 이처럼 왕따, 혹은 배척당하게 된 원인은 뭘까.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여성개발원 연구원으로 일하다 논술학원 명강사로 변신한 서영준씨는 “각 대학의 자존심, 학부모들의 조급함, 학원들의 상술이 결합되어 진정한 논술시험이 아니라 벼락치기 식 암기형 글쓰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제시문에 따라 기계화된 모범답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배경으로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쳐가는 논술은 하루아침에 실력을 키울 수 없다. 또 현행 교육조건에서 학생들은 내신성적을 관리하기에도 벅차 다양한 독서를 할 여유도 없다. 그러나 각 대학은 ‘서울대 식 논술’ ‘고려대 스타일’ 등 자기 대학의 자존심을 내걸고 온갖 고전과 철학자들의 글을 동원해 어떻게 하면 더 어렵고 난해한 제시문을 낼까만 경쟁하고 있다. 학부모 역시 아이에게 평소 아이와 함께 책을 읽거나 시사문제를 토론하기보다는 ‘논술학원’에 보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논술학원 역시 수능시험을 치르고 온 학생들에게 한두 달 정도 각종 제시문이나 주제어에 어울리는 학자와 저서, 인용문 등을 복사해두고 글쓰기 훈련만 집중적으로 시킨다. 학생들 역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미셸 푸코, 들뢰즈 등 학자나 공자, 맹자 등의 인용문만 암기하고도 자신이 유식해진 듯한 착각에 빠져 ‘제시문’을 받아들면 반사적으로 인용부터 시작하는 ‘강남형 논술답안’을 쓰게 된다는 것.

토론형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학원도 마찬가지. 토론을 하려면 그 주제에 대한 충분한 사전 지식을 갖추고 준비를 해야 하지만 학생들은 준비 없이 그 수업시간에 수다를 떨고 논술강사가 중간에 개입해 정정을 해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어렵게 글쓰기보다야 재미있지만 체계적인 지식이 쌓일 수가 없다. 또 ‘정형화를 탈피한다’ ‘자기 주장만 강하게 하면 된다’는 식의 역발상 논술법을 지도하는 학원도 있다. 이들은 무조건 거꾸로 생각하라고만 지도받아 논리적인 전개보다는 억지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기교만 훈련받는다.

올해 연세대에 합격한 변수인양은 “논술학원에서 준 모범답안으로 공부한 탓인지 ‘경제성장과 삶의 질’이라는 논제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방글라데시의 행복지수는 1위다’ ‘자살’ 하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등의 연상이 기계적으로 따라와 나의 생각을 잘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 출제위원이나 채점 교수들도 사교육형 논술을 ‘척 보면 안다’고 자신했다. 9년 간 채점위원으로 참여해온 서울대의 한 교수도 “논술 사교육을 받은 수험생의 답안에는 ‘정의’만 나오면 영국 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 ‘무지의 베일’이 등장한다. 모두 천편일률적”이라고 비판했다. 출제위원들이 지적하는 사교육 답안지의 치명적 약점은 학생 스스로 소화할 수 없는 ‘라캉·니체·데카르트’ 등의 어록을 줄줄이 인용하는 습관이다.

“강남 논술 죽지 않는다” 예견도

연세대의 한 교수는 “강남 논술학원들은 386세대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운동권 출신이어서 사물이나 사건을 극단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또 철학과·국문과 대학원 출신의 논술강사들이 출제 의도보다는 현학적인 개념, 어휘, 철학자의 구호를 알려주기 때문에 학생들이 맞지 않는 큰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고 말했다.

더구나 전국에 프랜차이즈를 가진 대형 학원들의 경우는 물론 소규모 학원들 역시 목적은 교육이 아니라 돈벌이임이 확실하다. 학생들에게 각 대학 기출제 문제를 보여주고 모범답안과 인용문구를 주고 외게 하거나 글쓴 것을 첨삭지도하는 것이 수업방식이다. 첨삭지도도 대학원 박사과정 등의 수준급 보조원이 아니라 대학 1, 2학년들에게 1건당 1000~2000원씩 주며 ‘착취’하듯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곳도 많다. 그러니 제대로 된 읽기나 쓰기, 혹은 바로잡기가 힘든 게 당연하다.

이렇게 문제가 많아도 강남 논술학원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예견하는 이들이 많다. 당장 내년도부터 시행되는 통합논술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나 방법을 알고 대비하는 학교가 없기 때문에 아이나 학부모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학원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강남 논술학원의 명강사 서영준씨는 “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습관을 길러주고, 학교에서는 글쓰는 시간을 늘리고 대학은 난해한 제시문보다 고교과정에서 배운 것들로 논술시험을 내면 된다”면서 “그러나 절대 글쓰기는 하루아침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유인경 편집위원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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